은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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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소개
은해사 역사소개

천년 고찰 팔공산 은해사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의 가람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으로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역사 속의 은해사 출신 스님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스님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다.(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 최근에도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현재에는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 분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계신다. 또한 한국불교 최고의 경율론 삼장법사과정인 대한불교 조계종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10여 분의 석학들이 정진 수학중이시다.


은해사 성보박물관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 신장탱화, 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은해사를 중심으로 암자와 말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성보문화재를 수집해서 도난과 훼손을 방지하고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 전시하기 위한 성보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1996년 12월23일 착공하여 2003년 4월 19일에 준공하였고, 2005년 5월에 개관하였다.
성보박물관은 건평 140여평의 전면 9칸, 측면 5칸의 전통목조건축 형식에 실내전시공간을 비롯하여 학예실, 수장고등이 마련되어 있다. 은해사는 천년의 역사와 수많은, 수만의 고승,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유익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대 사찰이다. 팔공산 자락에서 대중포교 사업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통일 운동에도 앞장 서고 있는 은해사에 모두들 한번 와 보시기 바랍니다.


은해사 역사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에 해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에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그 해안사 절터이니 운부암을 가는 길에 한번 관심있게 살펴보기 바란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시대 1270년(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485년 성종 16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내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지만 1651년 효종 2년에 각 전각들이 단청 불사를 시행한 기록으로 보아 왜란을 격으면서도 큰 피해는 입지 않은 듯 하다. 1712년 숙종 38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다.
1761년 천왕문을 세우고 1772년에는 자암스님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스님이 영산전과 시왕전의 불상을 개분했다. 영조는 왕자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영조 등극후에 어제완문이라 하여 이절을 수호하는데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1847년 헌종 13년에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불이 났다. 이때의 화재는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러자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의 어제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은해사를 중창하고자 당시 영천 군수 김기철이 300궤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했으며, 대구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였다.
그리하여 수만냥의 재원을 확보하여 3년여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 1849년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지어진 건물이 대웅전, 향실, 고간, 심검당, 설선당, 청풍료, 보화루, 옹호문, 안양전, 동별당, 만월당, 향적각, 공객주 등인데 이 중에서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
조선조 왕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뒤 고종 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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